글로벌 연기금 “달러 비중 축소”…美에 쏠린 K-머니·연금 ‘노란불’ [홍길용의 화식열전]

입력
수정2025.05.12. 오전 10:54
기사원문
홍길용 기자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미국 (달러)자산 투자는 이제 정점이 아닌가 싶다”

미국 투자비중이 가장 많은 연기금 가운데 하나인 호주 유니슈퍼(UniSuper)의 존 피어스 최고투자책임자(CIO)가 최근 파이낸셜타임즈(FT)에 털어놓은 말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3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투자자들은 미국 비중을 역대 최대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답했다. 유럽 비중을 높이겠다는 응답은 1999년 이후 가장 높게 나타났다. 모닝스타(MorningStar)의 최근 조사를 보면 지난 4월 유럽에 등록된 상장지수펀드(ETF)가 지난 달 순 유출은 25억 달러로 2023년 초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글로벌 큰 손들 일제히 달러 비중 축소


도이치방크 등에서도 유럽 큰 손들의 달러자산 매각 소식이 잇따라 전해지고 있다. 핀란드와 덴마크 등 유럽의 주요 연기금도 미국 자산 비중을 축소하기로 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다. 심지어 운용자산 3500억 달러의 미국 간판 연기금인 캘리포니아주교직원퇴직연금(CalSTRS)로 미국 내에 집중된 포트폴리오를 분산할 지 여부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요약하면 최근 글로벌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에서 달러, 즉 미국 자산 비중을 낮추기로 했다. 얼마나 줄이고 대신 어디를 늘릴지가 고민일 뿐 줄이는 방향에는 거의가 동의하는 분위기다. 글로벌 큰 손들이 미국 비중 축소에 나선 이유는 뭘까?

미국을 제외하면 모두 자국 보다 해외투자비중이 더 높음. 해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미국


가치가 상승하는 곳에 투자하는 것은 투자의 불문율이다. 통화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주요통화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취임 1주일 전인 지난 1월 13일을 단기 정점으로 내리막이다. 유로화가 뚜렷한 강세이고 최근에는 신흥국 통화가치까지 오르고 있다. 지난 주에는 대만 달러 가치가 급등해 금융시장이 난리가 나기도 했다.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면 달러 자산을 자국 통화로 환산한 액수가 줄어든다. 환차손이다. 달러 자산 비중을 줄이지 않고 있다가 달러 가치가 계속 하락하면 가만히 앉아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달러 가치는 계속 하락할까?

국내 보다 해외투자 비중이 더 높음


트럼프가 바꾼 글로벌 자금 흐름…“달러 자산, 안 팔면 손해”


현재 미국은 대부분의 국가에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이 무역에서 번 달러로 미국 국채와 주식에 투자한다. 글로벌 투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미국 정부와 기업은 국채와 주식을 계속 발행했다. 그만큼 달러 량도 늘어났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가치가 하락해야하지만 미국은 예외였다. 글로벌 패권 국인 미국의 달러는 안전자산의 프리미엄을 갖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양적완화로 달러를 살포했음에도 달러인덱스는 상승, 즉 달러의 상대적 가치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같은 달러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소비시장이다. 장사에서는 손님이 갑(甲)이다. 트럼프가 무역의 룰(rule)은 바꿀 수 있지만 이는 되레 글로벌 금융의 흐름을 역전(unwind) 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트럼프의 무역적자 축소와 재정지출 부담 경감 추구는 금리하락, 즉 달러 약세 방향이다.

대형연금펀드와 마찬가지로 미국 투자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음


미국이 달러를 무기화하면서 외환보유고 등 나라의 국부를 달러로만 가지고 있기도 불안해졌다. 안전 자산으로서의 달러 프리미엄 축소다. 방향이 확실하다면 투자의사 결정도 간단해진다. 하락하는 자산에서는 빨리 탈출하는 게 유리하다. 일단 매도가 시작되면 가격 하락이 추가 매도를 부추기게 된다. 최근 글로벌 투자자들 사이에 달러 자산시장의 ‘눈사태(avalanche)’ 효과 우려가 등장한 이유다.

미국에만 메달린 한국의 큰손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 대한 투자 열풍은 전세계적이었다. 이 중 가장 열심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2010년대 초에는 주로 국민연금(NPS)과 한국투자공사(KIC) 그리고 보험사들이 많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개인 투자가 늘었다. 현재 한국의 미국 자산 보유 순위는 주식이 8위(3000억 달러 이상), 채권이 18위(760억 달러 이상) 정도다. 총액이 아닌 증가율 순위로 따지면 단연 세계 1위다. 한국 투자자가 최근 몇 년 새 미국 증시가 나 홀로 질주하는 동안 가장 많은 수익을 거뒀다는 뜻이다. 동시에 미국 자산 가치가 하락하면 가장 큰 손실을 볼 위치에 서 있는 것도 한국의 투자자라는 뜻도 된다.

개인의 투자는 각자의 몫이다. 문제는 공공자금이다. 국민연금의 미국 투자비중은 전세계 대형 연기금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2월말 기준 운용자산 1278조원 가운데 북미 주식이 290조원, 미국 채권이 38조원에 달한다. 2022~2024년 3년간 운용수익 206조8750억원 가운데 해외주식 및 채권에서 얻은 게 155조원이 넘는다. 달러 자산의 매력이 떨어지는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해외에만 투자하는 KIC는 더 심각하다. 주식(해외) 비중이 40%에 달하는 데 전체 운용자산(2023년말 246조원) 가운데 61% 이상이 북미에 집중돼 있다. 한국은행도 전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며 외환보유고의 70%를 달러로만 보유하고 있다. 최근 값이 급등한 금(金) 투자 비중도 전세계 꼴찌 수준이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달러 비중은 전세계 평균보다 아주 높다. 원래도 높았는데 달러 비중을 줄이는 세계적 흐름과 달리 계속 높아졌다. 글로벌 연기금 포트폴리오에서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미만이고 해외주식 비중은 더 낮다. 국민연금은 해외주식 비중만 35.4%에 달해 전세계 주요 연기금 가운데 가장 높다. 해외주식의 3분의 2가 북미, 즉 미국이다.


갈 곳 잃은 K-머니…‘다른 길’도 몰라


개인과 달리 초대형 기관들은 포트폴리오 전환이 쉽지 않다. 유동성 부담으로 한꺼번에 많은 자산을 팔기도 어렵다. 새로운 투자대상을 찾는 일도 간단하지 않다. 해외투자와 관련된 국내 전문가 대부분은 미국 기반이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까지 미국 쏠림이다. 미국 밖에서 유망한 투자자산을 발굴할 역량이 부족하다. 대비도 없었고 필요성에 대한 인식 조차 없었다. 많은 비용을 치르더라도 해외 중개회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달러 패권이 흔들리면 유력 화폐의 난립 시대가 도래할 지도 모른다. 중국에 이어 유럽도 유로화 위상 강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천문학적 국민 노후자금을 들고 처음 가는 길을 낯선 안내자와 함께 해야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국내로 발길을 돌리기도 애매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2040년 0%대로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3년 전 전망치 보다 단기(2025~2030년)는 0.4%포인트, 중기(2031~2040년) 0.6%포인트, 장기(2041~2050년)은 0.6%포인트 낮아졌다. 잠재성장률은 성장할 수 있는 역량, 즉 기초체력이다. 0%대면 성장이 아닌 소멸로의 발걸음이다. 올해만 해도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돌 가능성이 크다. 성장률이 낮아지면 국민연금의 보험료 수입과 국내 운용수익이 동시에 줄어들 수 있다. 국내 성장 동력이 소멸된 상황에서 연기금과 국부펀드마저 치명상을 입는다면 경제는 물론 국가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우리 정치 및 경제 상황에 대해 안이한 인식이 아직 많은 듯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깊고 심각한 저출생과 고령화의 원인 진단조차 분명치 않다. 한국 기업의 밸류에이션은 세계 최저 수준인데 극심한 내수침체에도 해외여행 수요는 견조하다. 생산 구조는 이미 한계에 달했고 소비와 부의 운용 체제도 곧 막다른 길이다. 모든 경제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 능력이다. 도전을 극복해 선진국이 된 나라도 있지만, 도전에 굴복해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뒷걸음 친 나라가 더 많다. 미국과 달러에만 쏠렸던 우리 정치와 경제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재조정하는 지를 보면 대한민국이 이 궁지를 벗어날 지 여부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자 프로필

{{/list}} 닫기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경제, 세계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